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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꽃, 생명의 절정 찬란한 광휘
빛과 꽃, 생명의 절정 찬란한 광휘
  • 월간리치
  • 승인 2017.01.03 15:50
  • 호수 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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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부르기 전이라도 좋다. 다가가기만 하면 생명이 깃든 존재가 차고 넘치는 순간이 어떠한지를, 일순간 혹은 찰나를 포획한 장면이 망막을 거쳐 심상 가득 번지기 때문이다. 드러난 외양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에 깃든 생명력을 색·면에 담아온 서효숙 작가의 작품성과 예술세계를 리치에서 조명해 본다.

글로 옮기면 시가 될 법한 켜켜이 숙성한 사유의 깊이가 깊을수록 감각과 지각 나아가 사람 인식의 온 영역에 걸쳐 확장시키는 심상으로 재구성된다.
작가의 길을 나선 이후 일관되게 생명의 힘과 시원, 존재양식을 예술적 형상으로 구현하는 일에 몰두했던 서효숙 작가.


생명성의 존귀함 찬미

서 작가 창작 에너지는 오랜 관조와 몰입이 거듭되는 사이 극대화한다.
“오래된 마을의 담장 밑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이나 그 꽃에 내려앉는 햇볕도 모두 스스로의 내부에 존엄한 정신과 신을 내포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서효숙은 이러한 생명, 살아있는 것들의 울림에 애정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하계훈 미술평론가)
하 평론가에 따르면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신(神)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고 스트라톤은 모든 사물은 곧 모든 정신적인 존재가 물질로 환원된 것이라고 보았다.
서 작가는 스스로 몰두했던 창작과정에서 저절로 추구하는 도(道)가 됐다. 모든 물질이 그 자체로 생명이 있고 스스로의 영성에 따라 존재의 극의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에 예술작품으로 담아낸 것이다.


꽃과 나무 내면성찰의 응결

이승훈 평론가(사이미술연구소)는 서 작가의 주된 작업이 자연 속 나무와 꽃과 같은 식물들을 소재로 한 것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서 작가가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거나 미적 감성을 환기시키기 위한 작업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점을 높이 산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 목적이 나무와 꽃의 가장 아름다운 상황을 연출하려 하거나, 대상을 미적 표현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같은 맥락이다. 
한 때는 자연 속 식물의 한 부분을 중심으로 하여 확대해서 보여주거나 식물의 정면 혹은 측면에 대해 세심하게 집중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이 주를 이뤘다.
이를 토대로 점차 화면 단위 면적별로 식물의 형체를 분해하는 변모를 보이기도 했다.
더 한 층 나아가서는 화면을 양분하여 한쪽은 역광으로부터 공기원근법에 의한 공간감을 느낄 수 있게 표현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화면과 식물의 형태만을 드로잉한 화면으로 대비시킴으로써 변화를 시도하는 화풍으로 주목을 받았다.


나고 자라고 핀 존재들의 광휘

우리가 정물화와 풍경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꽃과 나무와 서효숙 작가가 피우고 펼치는 생명들의 근본적 차이를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외면 관찰의 심상을 담는 것이 아니라 꽃으로 집약되는 생명 존재와 동화되는 수준의 심상으로 밀착 내지는 자연스럽게 내재화하는 심상으로 분화되고 침잠하지 않았다면 포획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투영돼 있어서다.
꽃잎 하나하나 꽃대와 줄기 하나하나 커다란 확대경으로 줌-인 하듯이 자세하게 표현된 화면에서 이름을 몰라도 한 생명존재의 절정과 극한의 때를 생생하게 표현한다.
때론 절정을 향해 다가가는 한 단계, 때로는 절정 그 자체에 올라 있는 모든 생명 존재에게는  축복과 같은 환환 빛이 깃들 때 더욱 찬란할 수 있음을 감상자 누구에게나 공감을 이끄는 게 그의 매력이다.


멈춤 속의 움직임 삶의 입체성

서 작가 작업들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특성은 존재양식의 쌍방향성 탐구를 통해 궁극에는 각각 존재마다 확보한 삶의 입체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힘이다.
움직임이 드러나는 존재가 아니라 나무나 꽃과 같이 스스로의 움직임이 외형화되지 않는 자연물, 식물을 작품 소재로 삼았기에 창조할 수 있는 세계인 셈이다.
겉 보기엔 죽은 듯이 멈춰 있는 것 같은 존재지만 그 안에 쉼 없이 샘솟고 이어가며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영성의 눈으로 쫓거나 차리리 눈 감고 우리 의식과 감각을 완전히 개방했을 때 공감할 수 있는 세계를 능숙하게 출입하며 본질의 깊이를 탐사한다.
촉각으로 보듬고 영성의 눈으로 씻어 내리며 온 감각과 의식의 빛으로 덮었다가 어둠으로 들춰내기를 무한 반복하다 포착하는 어느 국면, 어느 순간, 어떤 자태를 서 작가만의 해석으로 옮겨 놓는 곳이 그가 다듬어 내는 화폭이 된다.


존재 본성을 향한 끝없는 천착

“이전 작업들이 단순히 식물의 한 부분을 향해 시선을 클로즈업하여 미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에서 조그만 흔들림이라도 발견하고자 하려는 것처럼 화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방식으로 살아있음에 대한 역설을 기록해내는 작업이었다면, 최근 작업은 시선으로 들어온 화면을 픽셀처럼 정방형의 면적 단위로 분해시켜 생명력 자체를 강하게 부정하려는 것처럼 생명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이승훈 평론가)
또 한 번의 변모는 빛에 의해 보이게 되고 확인될 수 있는 형상의 새로움에 천착하는 스타일로의 변모다.
이 평론가에 따르면 “시선에 들어오는 살아있는 대상으로서의 식물의 형상이 결국 빛에 의해서 보이게 되고 확인될 수 있는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서 작가는 이를 전제로 ‘빛이 그리다’라는 그의 언급에서처럼 빛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식물들에 창작을 전념하고 있다.


은은한 폭발력 길어내는 솜씨

또한 감각기관에 반영된 장면을 단순히 선묘적 방법을 사용하여 형태의 굴곡만을 그려낸 드로잉 작업을 양립시키거나 대비시키는 기법으로 ‘빛’이 만들어내는 생명력 충만한 생명존재를 부각시키기도 한다.
결코 어떤 순간에도 고정됨이 없는 존재의 가치, 지향하는 역동성어린 내면이 외부 자극 혹은 인연을 만나 표출하게 되는 빛과 반응, 그리고 다가서는 자와 본래의 생명존재 사이에 놓인 공간에서 발현되는 떨림과 파장을 서 작가는 증명해 낸다.
화면의 두가지 구조를 만들어내는 작품 세계 변모는 작가의식의 성숙과 궤를 같이 해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멈춰 선 듯한 그 순간에도 충만한 생명의 기운이 시각적 근접의 극한에서 혹은 아홉 방향 어디로 빛살이 쏟아지더라도 진퇴가 자유로운 식물 생명성 탐구와 실사의 최종적 열매, 작품세계 또한 창작의식의 광휘와 의미를 발현해내는 과정임을 작품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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