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에 가까운 형상화냐, 아니면
고양된 미의식의 추상적 응축이냐?
회화 미학의 표현이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재현하는 쪽과 미적 감정 또는 미의식을 추상언어로 표현하는 쪽, 크게 보아 두 갈래로 대별하는 게 일반적인데 조혜숙 화백 작품세계엔 이같은 구분이 의미 없어 진다.
서로 상충할 것 같은 두 가지 요소를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조형적 변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시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형섭 미술평론가는 “형상과 추상이라는 이질적 요소가 만나는 중간지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조형적 변화 및 변조를 통해 시각적인 긴장을 야기하는 현대회화의 한 속성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풀이한다.
현대인 미적 감각 구현을 지향
아울러 조 화가는 현대인의 미적 감각과 일치하는 어떤 지점을 찾아 나서되, 주관적 정서나 미의식에 의탁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삶의 배경과 양식이 고정되지 않은 채 빠르게 바뀌어가는 세상 속에서 현대인의 정서에 합치될 수 있는 영역대를 포착하고자 하는 집중력이 발휘된다는 이야기.
당연히 주어진 소재와 대상의 형태는 곧 잘 해체 또는 파괴를 거쳐 재구성 하기를 즐긴다. 복잡다기한 현대인의 삶과 의식세계를 다루는데 유용하며 효과적이어서다.
그리고 구상과 추상이 해체적 재구성이 어우러지는 것에 더해, 대담하고 솔직한 붓 놀림으로 속도감을 수반한다.
감성과 의식이 빠르게 천변만화하는 흐름을 가장 잘 투영시킬 수 있는 항로를 누빈다고나 할까.
형상화된 이미지는 감성과 미의식이 고조 또는 긴장관계에 따라 고저장단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때로는 과감한 적극성을 띠다가 세밀하며 함축적이 되기도 하며 팽창과 수축이 자유자재로 탈바꿈된다.
미적 감흥과 붓 가는 법의 일치
조혜숙 화가의 붓 가는 법은 미적 감흥이 지닌 호흡에 일치한다. 소재와 대상을 매개로 발현하고자 하는 미적감흥이 미의식의 호흡과 어우러져 순도 높은 형상과 이미지들로 담금질 한다.
그에게서 쉬이 느껴지는 역동적인 화풍은 미적 감흥과 호흡이 특유의 붓놀림으로 구현시키는 시각언어로 보는 이들의 심상 가득히 차오르는 서정시이고 담론이다.
감성의 흐름이 빠르고 기복이 크며 표정을 풍부하게 나타낼 때 붓의 제스처가 특히 역동적인 까닭이다.
신형섭 평론가는 “인물화의 경우 대체로 감정의 흐름이 빠르고 큰데, 아마도 표현대상인 인물 자체가 고유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면서 그에 비해 정물이나 풍경은 일정한 곳에 소재가 놓여 있다는 점에서 정적인 대상이 된다고 했다.
동적인 대상으로서 인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고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 감정과 의식을 드러낼 수 있어 고정된 형태를 지닌 정물이나 변화가 훨씬 느린 풍경과 달리 시시각각 가변적인 특성을 담아내기 위한 창작적 대응의 결과인 셈이다.
빠르고 명징한 ‘速寫’와 스케일
조 화가의 인물화가 정물이나 풍경보다 움직임이 크고 다채로운 이유가 여기 있다. 한 자리에서 단숨에 그린 듯 보이는 인물화들도 있는데 얼마만큼 생생하고 역동적인 속도감을 발현하는지 잘 느낄 수 있다.
어느 한 군데 머뭇거림이나 더듬거림 없는 활달함은 심상의 명확함에서 비롯한다.
명확한 인지로부터 뿌리 내린 마음 속의 상이 미의식의 고양과 침잠을 거치면서 인물이 지닌 삶의 궤적과 감정의 흐름, 그 자체 독자적 역사 혹은 ‘소우주’로서 인물마다 지니고 있는 고유의 가치들이 다채로운 해석의 변주로 무궁무진하게 조형하는 솜씨가 돋보인다.
표현 대상으로서 인물 형상과 이미지의 원형이 보유한 명징(明澄)함을 올올이 담으려다 보니 속사(速寫)적인 재창조로 이어지곤 한다.
정태성 기저에 샘솟는 역동성
정물화는 인물화와 또 다른 양상이다. 특정한 장소와 조건에 귀속된 소재와 대상에서 오는 정태적 속성이 때로는 평면적 이미지로 투영되기도 한다.
불규칙한 몇 개의 면으로 구획된 그 위에 소재를 배치하는 간결한 구성, 평면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명암이나 원근법 따위 실재하는 공간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다.
단순하고 간명하며 평면적 이미지로 형성되는 인상의 총합은 정태적이다. 물론 평면 이미지 위에서 최종적으로 형상을 결정짓는 것은 인물화에서 활달했던 선들이다.
꽃을 소재로 한 경우엔 배경을 비표현적 이미지, 즉 공간으로 처리하면서 꽃을 역동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꽃 형태를 마무리 짓는 한 두 개의 선은 언제나 자율적이며 역동적이다.
격정적인 표현의지가 담긴 붓의 리듬과 그로 인한 시각적 감흥을 구축함으로써 구체적 묘사로 획득하기 어려운 미적 감동의 울림을 확보한다.
이성과 성찰이 빚는 아름다움
그리고 이제 감성을 억제하는 대신에 이성적이고 논리적 성찰과 사유의 열매로서 결정체를 빚는 작업으로 전환했다.
사실 평면적 구성으로 바뀌었던 정물화에서 그 단초는 드러났다. 논리적이고 이상적인 화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흐름이다.
색채이미지 또한 원색보다 중간색, 즉 이차색이나 삼차색으로 나아간다.
심미감과 삶을 관조하는 성찰의 깊이가 원숙해지면서 사유의 세계를 소묘의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으로 응축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각과 지각, 감흥과 이성, 구체와 추상 사이의 순환과 반변(反變)은 원초적인 법칙으로서 서로 공존하며 보완하기 마련이다.
본질적으로 언제나 그렇듯 조혜숙 화가의 자연스러운 활달함과 솔직함이 밑바탕을 이룬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