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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한양 천도와 서울 600년....이종천의 풍수지리 이야기   8
이성계의 한양 천도와 서울 600년....이종천의 풍수지리 이야기   8
  • 이종천 풍수학회 회장
  • 승인 2024.07.0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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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들, 도읍지 이렇게 옮겼다
향원정

 

올해는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개국한 후 한양으로 천도한 지 630년이 되는 해다. 조선 초기 한양은 인구가 10만 명이 채 못됐는데, 600여 년 동안 발전을 거듭해 2024년 5월 현재 서울시 인구가 937만 명이나 되는 국제적 도시이자,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움직이는 대한민국의 심장부가 됐다. 이것은 당시 천도(遷都)의 조건으로 ‘풍수지리적 명당’을 기준으로 삼았던 이성계의 먼 훗날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자리 잡기 위해선 태조 이성계의 한양 천도, 2대 정종의 개성 환도(還都), 3대 태종의 한양환도 등 사연도 많았다. 당시 조선 왕들이 도읍지를 옮기는 과정을 살펴본다.

도선(道詵) 도참설(圖讖說)에 의한 
한양의 명당지세
  
도선도참(道詵圖讖)에 ‘왕이 될 이(李)씨는 한양에 도읍하리라’고 하여 고려 말기에는 인심이 흉흉했다. 또 당시 신비로운 비결로 삼았던 ‘신지비결(神誌秘訣)’은 고려시대의 삼경인 송경(松京: 개성), 서경(西京: 평양), 남경(南京: 한양)을 비유한 내용 중 한양을 가리켜 ‘삼각산 남쪽 땅은 덕스러운 다섯 언덕을 짓고 있다(三角之南 爲五德丘)’고 했는데, 이것은 한양의 북악산(북=주산), 관악산(남=조산), 낙산(동=좌청룡), 인왕산(서=우백호), 남산(중앙=안산)의 지세가 도읍지와 명당의 조건을 갖춘, ‘지덕(地德) 있는 터’라는 뜻이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고려를 멸(滅)하고 조선을 개국하면서 개경 수창궁(壽昌宮) 화평전(和平殿)에서 즉위한 후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천도(遷都)하는 과정은 철저하게 ‘풍수지리 이론(風水地理理論)’을 적용해 결정했다.


고려조의 남경 한양  
     
고려사(高麗史)에서 한양을 가리켜 ‘북으로 화산(華山: 북한산)을 의지하고 남으로 한강을 바라보며 땅이 펑퍼짐하니 백성이 번영할 터전’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고려 조정이 한양 땅을 명당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제11대 문종 22년(1068)에 한양에 이궁(離宮)을 짓고 남경(南京)이라 하였으며 제15대 숙종 때에는 남경으로 아예 도읍을 옮기자는 남경천도론(南京遷都論)까지 대두했다. 물론 천도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숙종 9년(1104) 5월에는 삼각산(三角山) 이남 목멱산(木覓山: 남산) 이북의 평평한 땅 안, 곧 지금의 서울 도심지 안에 새 궁(宮)을 지었다. 이는 도선비기(道詵秘記)를 신봉하던 김위제의 의견인 1년 중 3·4·5·6월의 넉 달 동안은 한양에서 정사를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당시 남경신궁(南京新宮) 터는 지금의 경복궁 위 옛 청와대(靑瓦臺) 터 근처였다고 전한다. 이렇듯 한양은 고려 중엽이었던 11세기 당시 수도인 개성과 평양에 버금가는 제3대 도시로 인식됐다. 그 후 고려 문종 이래 남경으로 불리던 한양은 제25대 충렬왕 24년(1298)에 이르러 한양부(漢陽府)로 승격됐다. 이어서 한양 천도를 외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한다. 고려 말기의 31대 공민왕은 보우선사의 도참설에 마음이 끌려 재위 6년(1357)에 남경의 옛 궁을 수리하고 도읍을 옮기려 했다.
고려사는 당시 ‘남경 천도설로 인하여 민심이 동요돼 짐 보따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남경 쪽으로 몰려드는 사람이 많았지만, 관청에서도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고 하며 32대 우왕 8년(1382) 8월과 제34대 공양왕 2년(1390) 9월 잠시 남경에 천도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 조정, 이성계를 경계하다
  
고려 말 국력이 피폐해지고 민심이 이탈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함흥 출신의 무장 이성계가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등 날로 덕망 높은 인물로 떠오를 즈음, ‘한양은 이씨가 도읍할 터전으로 예시되어 있다’는 도참설(圖讖說)이 크게 퍼져나갔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씨의 왕기(王氣)를 누르기 위해서 한양 땅 여러 곳에 이씨를 상징하는 오얏 나무를 심어놓고 무성해지면 베어버리곤 했다. 왕이 일 년에 반드시 한번은 한양 땅을 밟고 임금의 옷인 용봉장(龍鳳帳)을 땅속에 묻게 하는 등 한양의 지기(地氣)와 왕기(王氣)를 억누르는 의식을 거행했다.
또 당시 강원도 삼척지방에 왕기가 서린다는 소문이 있어 삼척 부사에게 “이씨 조상의 명당 묘를 찾아서 파 헤처라”고 명령하자 삼척부사가 직접 말을 타고 이성계의 5대조인 준경 묘 입구의 언덕 위에 올라갔으나 갑자기 말이 두 다리를 들고 괴성을 지르며 날뛰는 바람에 낙마하고 되돌아간 후 ‘삼척에는 왕기가 서릴 만한 명당이 없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렸다 한다.


이성계의 등극과 한양 천도의 꿈
  
1392년 7년 17일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성계는 개경에서 임금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조선이라 명명했으나 당시 개경은 고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반기지 않는 권문세족들의 본거지로서 개경의 민심은 이성계 편이 아니었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창업하자마자 수도를 옮길 것을 결심하고, 다음 달인 8월 15일 삼사우복(三司右僕) 이염(李廉)을 한양으로 보내 고려의 이궁을 수리하도록 명령했으나 시중 배극렴과 조준이 “궁성이 이룩되지 않았는데 천도하면 문제가 많으니 궁성과 도성을 조성한 후 옮겨가야 합니다”고 주장하자 태조는 사람을 풀어 새 도읍 터를 물색했다.


계룡산 명당론과 한양천도
 
태조 2년 1월 2일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權仲和)가 돌아와서 계룡산 아래 신도안(新都內)의 지도를 태조에게 바치면서 도읍지 터를 찾았다고 했다. 이에 마음이 동한 태조는 1월 18일 개성에서 출발해 21일 양주 회암사의 무학 대사를 동반하고, 2월 8일 계룡산에 당도해 도성으로서의 형세와 부근 교통 사정을 샅샅이 살핀 다음 이곳을 도읍 터로 정하고 3월부터 공사를 시작, 그해 12월까지 10개월 동안 도성 공사를 계속했으나 풍수지리에 능한 경기좌우도 관찰사 하륜의 반대로 계룡산 천도 계획을 포기하고 국토의 중심부인 한양에서 찾기로 했다.
이에 하륜은 모악 주산론을, 무학 대사는 인왕 주산론을, 정도전은 북악 주산론을 주장해 격론 끝에 정도전의 북악 주산론으로 결정하고, 경복궁을 조성한 후 1394년 10월(음) 한양으로 천도했으나 1397년 신덕왕후가 죽자 기회를 노리던 정안군 이방원에 의해 정도전 일파와 세자 방석, 방번 형제를 죽이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본지 5월호 참조).


제1차 왕자의 난과 정도전의 죽음

태조 이후 왕위를 노리던 정안군 이방원은 신덕왕후와 정도전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중 1397년 신덕왕후가 어린 세자 형제를 남기고 갑작스레 서거했다. 당시 62세이던 태조는 사랑하는 왕비의 죽음과 어린 세자에 대한 걱정으로 깊은 병을 얻었다. 태조가 병석에 눕자 조선의 개국공신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이용, 신권 강화를 꿈꾸고 있던 정도전과 야심만만한 정안대군은 상대방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8년(태조 7년) 8월 26일 삼봉 정도전과 남은 등은 정적인 정안대군 형제들을 제거하기로 계획하고, 태조의 병문안을 핑계로 왕자들을 경복궁에 불러 죽이려 했으나 박포의 밀고로 이를 알게 된 정안대군 이방원, 조준, 김사형 등은 한밤중에 경복궁을 빠져나와 사병들을 동원해 정도전, 남은 등을 죽이고 다시 경복궁에 들어가 왕세자 방석과 방번 형제를 죽여버렸다.
태조는 사랑하는 신덕왕후와의 사이에 낳은 왕세자와 왕자가 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자 크게 낙심해 이듬해인 1399년 3월 7일 둘째 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나버렸다. 2대 왕 정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경복궁에서의 참혹한 비극은 터가 나쁘기 때문”이라며 개경으로 환도했으니 태조 3년 10월 28일 한양으로 천도한 날부터 불과 4년 6개월 만에 벌어진 개경 환도였다.


제2차 왕자의 난(1400년 정종 2년)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박포는 논공행상에서 일등 공신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던 중 태조의 4남 방과가 왕위 계승에 야망을 품었으나 모든 면에서 동생 방원에게 밀리자 항상 시기심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고 방과에게 접근해 “방원이 장차 형을 죽이려 한다”고 이간질한 후 “선수를 쳐서 방원을 치자”고 부추겼다. 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들을 동원해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으나 방원에게 패해 유배를 가고 박포는 참수됐다.
이로써 방원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거의 소멸했고, 그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강화됐다.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정종은 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뒤 방원의 심복인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史) 하륜(河崙)의 주청을 받아들여 1400년 이방원을 왕세제로 책봉했으며 그해 11월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6년 8개월 만의 한양환도

정종의 개성 환도로 6년 8개월간 빈 궁궐이었던 경복궁은 ‘밤에 인왕산 호랑이가 근정전 뜰까지 들어왔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듯이 흉가로 방치돼 있었지만, 태종은 개경에서 왕이 된 후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태종은 4년(1404년) 9월 9일 ‘창덕궁 도성제조’를 한성에 보내 창덕궁 지을 터를 찾아 확정한 다음 그달 13일 ‘신도이궁도성도감’을 ‘궁궐보수도감’으로 개편하고 경복궁 보수를 명한 후 다음 해(즉위 5년) 한양으로 환도하려고 하자 신하들은 다시 개경, 무악, 한경을 궁궐터로 하자며 의견이 분분했다.
이에 태종은 종묘에 고하고 쟁반에 엽전을 던져서 점을 치게 했는데, 송도(개경)와 무악은 각각 1길(1吉) 2흉(2凶)으로 나왔고, 한양은 2길(吉) 1흉(1凶)으로 괘가 나왔으므로 그것을 빌미로 삼아 그해 10월 11일에 환도를 단행하고 각 도의 장정 3000명과 한성부민 600명을 동원해 궁궐을 보수하고, 경복궁에 명당수가 없어 터가 나쁘다는 주장을 불식시키기 위해 경복궁 서편에 연못을 파고 48개의 돌기둥을 세운 후 으리으리한 전각을 세웠으니 곧 경회루다.
태종은 환도 후 창덕궁에서 거처하다 즉위 11년(1411) 8월 9일 경복궁에 들면서 조선의 500년 도읍지로 자리매김했고, 세종대왕이 경복궁과 한양도성의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참고 자료: 조선왕조실록·
김영상의 저(著) ‘서울 6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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